하얀쉼표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어린시절.. 2021. 3. 8.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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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가능하다면 꽃밭이 있고 숲이 있었으면 좋겠어.
개울물 소리 졸졸 거리면 더 좋을 거야.
잠 없는 난 곤히 자는 당신 간지럽혀 깨워,
아직 안개 걷히지 않은 아침길
풀섶에 달린 이슬 담을 병을 들고 산책해야지.

삐걱거리는 허리 쭉 펴보이며
내가 당신 하나 둘 체조시킬거야.
햇살이 조금 퍼지기 시작하겠지.
우리의 가는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반짝일때,
나는 당신의 이마에 오랫동안 입맞춤 하고 싶어.
사람들이 봐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

아주 부드러운 죽으로
우리의 아침식사를 준비할꺼야.
이를테면 쇠고기 꼭꼭 다져넣고
파릇한 야채 띄워 파릇한 야채죽으로 해야지.
아마 당신 깔깔한 입안이 솜사탕 문듯 할거야.
이때 나즉히 모짜르트를 올려 놓아야지.

아주 연한 헤즐렛을 내리고
꽃무늬 박힌 찻잔 두개에 가득 담아,
잉크냄새 막 나는 신문을 볼꺼야.
코에 걸린 안경 넘어 당신의 눈빛을 읽겠지.
눈을 감고 다가가야지.
서툴지 않게 당신 코와 맞닿을 수 있어.
강아지처럼 부벼볼거야 그래보고 싶었거든,

해가 높이 오르고
창 깊숙이 들던 햇빛 물러설 즈음,
당신의 무릎을 베고 오래오래 낮잠도 자야지.
아이처럼 자장가도 부탁해 볼까.
어쩌면 그 때는 창밖의 많은 것들 세상의 분주한 것들,
우리를 닮아 아주 조용하고 아주 평화로울 꺼야.

나,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당신의 굽은 등에 기대어 울고 싶어.
장작불 같은 내 가슴
그 불씨 사그러들게 하느라 참 힘들었노라.
이별이 무서워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노라.
사랑하기에 너무 벅찬 그대,
나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말할 거야.


겨울엔 백화점 가서
당신의 마른 가슴 덥힐 스웨터를 살 거야.
잿빛모자 두개사서 하나씩 쓰고
강변 찻집으로 나가 볼 거야.
눈이 내릴까.
눈이 오면 좋겠다 그치..

봄엔 당신 연베이지 빛 점퍼입고,
내 목에 겨자빛 실크 스카프 메고,
이른 아침 조조영화를 보러 갈까.
드라이빙 미스테이지 같은...

가을엔 희끗한 머리 곱게 빗고,
헤즐렛 보온병에 담아들고 낙엽 밟으러 가야지.
저 벤치에 앉아 사진 한장 찍을까.
곱게 판넬하여 창가에 걸어둬야지.

그리고 서점에 가는거야.
당신 좋아하는 서점에 들러,
책을 한아름 사서 들고 서재로 가는거야.
당신 읽어주는 한줄 한줄에
난 푹 빠져 잠이 들겠지.

난 당신 책 읽는 모습을 보며,
화선지 속에, 내 가슴 속에
당신의 모습을 담아,
영원히 영원히 간직할꺼야.

나 늙으면,
그렇게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황정순/나 늙으면 이렇게 살아보고 싶어..

 

 

*20년 전에도 읽었던 글..

그땐 별다른 느낌이 없었던 글 이였는데,

오늘아침 오래된 지인이 메일로 보내온 이 글에

나의 노년을 생각해 보게된다..

 

#아!!!갑자기 왜 이렇게 슬프게 눈물이 나지..